유단자 품새
즉 다시 말해, 야생 동물의 공격이 불시에 어느 방향에서 행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즉각 그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민첩한 동작의 개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 동작을 수련하게 되었고, 그 과정을 거쳐 현대 태권도의 기본인 막기·차기·지르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태권도와 비슷한 무예의 형태와 발자취를 삼국시대에서부터 확실하게 발견할 수가 있다.
고구려 시대(37B.C~668A.D)의 고분 벽화에 '태권도의 겨루기를 하고 있는 두 젊은이'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A.D 3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현대 만주 통화성 집안현 통구)에 있으므로 인도의 달마 스님이 중국에 오기 훨씬 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고유의 무도를 발전시켜 왔음을 증명해 준다.
이 벽화를 보면, 한 젊은이는 왼쪽을 향하며 왼손으로 몸 중심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상대방은 왼쪽 손을 뻗어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고구려 벽화에서는 오늘날의 태권도 도복 및 띠와 아주 흡사한 수련복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도 발견할 수 있다. 그 그림의 주인공들은 머리를 방어하기 위해 왼손을 들어 얼굴막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얼굴막기와 오른손 아래막기는 현재의 태권도에서도 모두 사용되는 겨루기자세이다.
백제 시대(18B.C~660A.D)에서도 왕실의 지원으로 무예가 장려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말등타기, 궁술, 맨손격투기 등이 당시의 군사들이나 평민간에 대단한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손과 발 두 가지를 사용하는 호신술이 널리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백제 시대에도 오늘의 태권도가 비슷한 고유의 무예가 존재했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다.
- 체력 단련 · 군사 훈련 등에 관한 관심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태조(太祖)는 국교였던 불교를 유교로 바뀌었고, 따라서 지배 계층의 인생관 및 정치 · 문화관까지 모두 유교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반들은 중국 고전이나 읽고, 육체적으로 힘드는 활동은 오로지 상놈들만이 하게 되었다. 그러니 태권도(당시에는 태껸이라 불렀다) 같은 무예는 인기를 잃었으며 당연히 그 기술은 퇴보하게 되었다. 문관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관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무예니 무도니 하는 것은 말 그대로 거의 질식 상태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몇 세기가 지난 후 정조(正祖) 임금이 우리나라 고유의 무술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1790년 정조는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濟家)에게 우리 나라의 무술 전반에 걸쳐 다룬 교재를 편찬토록 하였는데, 그 속에 맨손격투기를 삽입토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이며, 이 책은 현재 한국 무예의 중요한 초기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목판 인쇄본으로 된 40여 페이지 분량의 이 책의 내용과 그림들은 당시 한국무예의 실상을 비교적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 태권도의 발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다수의 뜻 있는 사범들이 일제하에서 파생된 다양한 형태의 한국 무예를 개선 · 단일화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즉 외세의 영향으로 변질된 무술들의 난립을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형 맨손격투기로 재정립 · 통일시켜 국가적인 스포츠로 발전시키자는 데에 의견을 같이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청도관 · 조선연무관 · 무덕관, 개성에서 송무관 등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1946년 7월경 서울의 田祥燮, 李元國, 尹炳仁과 개성의 盧秉直 등이 주동이 되어 산재한 도장들을 총괄하는 협회부터 결성코자 2,3 차 화합을 가졌으나 실패하고, 일단 한국 무도의 표준형과 통일된 지도방법에 합의를 보았다.
또 하나의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 명칭은 태권도협회로서 첫 회장에 崔泓熙 육군소장, 부회장에 尹快炳, 盧秉直, 이사장에 黃琦가 선임되었다. 이와 같이 유사단체가 난립한 가운데 5 · 16 혁명을 맞았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포고령 제6호를 내려 사회단체 재등록을 명(命)함으로써 문교부는 1961년 7월 12일자로 공문을 보내 대한수박도회 · 공수도송무관 · 강덕원무도회 · 한무관중앙공수도장의 대표들을 소집해 놓고 통합을 주선했으나 명칭 문제로 결론이 나지 않자 옵서버로 참석했던李鐘佑가 중재에 나섰다. 결국 嚴雲奎, 李南石, 李鐘佑가 崔泓熙에게 타협안을 내놓음으로써 '대한태수도협회'로 낙찰을 보게 되었다.
마침내 9월 14일 통합창립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업무 추진을 7인위원회에 위촉했다. 9월 19일에는 이사회를 조직하고 임원진을 구성, 대한태수도협회가 공식 출범을 했는데, 회장은 공석, 부회장에는 嚴雲奎, 李鐘佑가 선임되었다. 62년 6월 25일 대한체육회에 가입하고, 10월 5일 사무실도 그곳으로 이전한 대한태수도협회는 그 다음해인 63년 6월 24일 임원을 개선, 회장에 蔡命新, 부회장에 李鐘佑, 전무이사에 嚴雲奎가 선임되었는데, 65년 8월 5일에 와서 대한태수도협회는 대한태권도협회라는 명칭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63년부터 매년 5, 6회 이상의 태권도 경기 대회가 개최되어 왔는데, 66년부터는 대통령기 쟁탈 전국단체대항 태권도 대회(10월 28일), 68년부터는 주한 외국인 개인선수권대회96월 16일), 70년부터는 전국초등학교 태권도 개인선수권대회(10월 24일)와 함께 여자부 태권도 선수권대회가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같이 태권도가 각계 각층의 호응을 받으며 확산되고, 온 국민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하자, 군에서도 그 우월성과 국방체육으로서의 가치를 인식, 정식수련 종목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실제로 월남전 등에서 참전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이용, 실전에서 맹위를 떨치자 한국 태권도는 세계적인 관심거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무도 스포츠로서 그 가치와 우월성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의 국기로 지정되었다. 그런 가운데 1971년 1월, 드디어 온 태권도계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다름 아닌, 다방면에 전천후적인 능력과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정력적인 활약으로 명망이 높던 金雲龍 전 국기원 원장이 대한태권도협회의 7대 회장으로 취임한 것. 그 해로 그는 그의 첫 공약 사업이자 모든 태권도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중앙도장 건립에 착수, 바로 그 다음해인 1972년 11월 30일 감격적인 개관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한국 태권도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73년 2월 6일 중앙도장을 태권도의 전당 '국기원'으로 명명(命名). 그 곳을 구심점으로 우리의 태권도는 국내는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빛나는 발자취를 남기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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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으며 이는 개국 초기의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사상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 말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고 도리로써 교화시킨다는 뜻이며 우리 민족 정신의 근간을 이루어 겨레사상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나름대로의 정신 세계를 구축해 오면서 전통적 사상과 함께 기량을 연마하는 무예정신을 계승, 발전시켰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원시 신앙에서 계승된 천신 사상의 발현인 제천의식을 통하여 당시의 무예 집단인 선배의 내면적 정신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선(仙)사상은 신라의 고선도(古仙道)를 부흥시켜 화랑도로 체계화 시킴으로써 신라의 찬란한 정신문화와 함께 당시의 국민적 대동 단결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민족 고유의 사상인 선사상과 외래사상인 유불사상이 결합된 화랑도 정신에서 강조되고 있는 충(忠), 효(孝), 신(信)의 덕목과 5계, 3미(三美) 즉 겸양정신과 검소한 정신, 절제의 정신을 체득케 하여 예의와 인격을 연마하였으며 신앙생활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심을 길렀다. 이렇듯 화랑정신을 기초로 하여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루는 기틀을 삼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통무예의 철학적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민족사적인 대업을 달성하는 선조들의 슬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 '홍익인간' '경천애인'등 우리의 전통적 사상은 한마디로 '인간중심' 즉 인본중의에 그 뜻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간존중 사상은 우리민족의 인덕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체질화 시켰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 속에서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며 덕이 높은 사람을 존경하는 정신이 싹트게 되었으며 이러한 정신은 유(儒), 불(佛), 선(仙), 동학(東學), 천도(天道)의 정신에서도 강조되었다.
또한 서경덕의 중심적 사상인 기일원론과 물질 불멸론과 주기론, 이퇴계의 중심적 사상인 사서 즉 인, 의, 예, 지와 7정인 희, 노, 애, 오, 욕과 같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나타난데 비하여 이율곡은 주자학을 토대로 보다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퇴계는 만물의 근본은 무극이며 태극[無極而太極]인 이(理)라 하였으나 율곡은 음양을 그 근본으로 삼았으며 퇴계는 "이"와 "기"를 분리하고 "이"의 근본성 · 초월성 · 선재성을 주장한데 비하여 율곡은 "이"와 "기"의 요합적 불가분리성을 주장하여 "이"의 초월성이나 선재성, "이"만의 근원성을 부정하였다. 또한 율곡은 그의 행동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자경문(自警文)에서 "성인의 경지에 이를때까지 끊임없이 자기극기에 노력하였다", "마음을 결정해야 될 일에는 먼저 말을 적게 하여야 한다", "해야할 일이면 정성을 다한다", "아무리 횡포한 사람이라도 감화시켜야 한다",
"수양과 학문은 완급이 없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등 그의 중심사상은 다분히 교육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적 기류가 있다면 동학사상과 천도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사상에서의 공통적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보국안민(保國安民)정신, 사심을 버리는 공인정신(公人精神)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횡포한 사람이라도 감화시켜야 한다",
"수양과 학문은 완급이 없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등 그의 중심사상은 다분히 교육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적 기류가 있다면 동학사상과 천도사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사상에서의 공통적인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보국안민(保國安民)정신, 사심을 버리는 공인정신(公人精神)이 그 바탕이 되고 있다.
- 한민족의 정신적 기둥인 선사상(仙思想)을 바탕으로 불교의 호국사상과 유교의 충효사상, 도교의 무언실행이 함유되어 주류를 이룬 자주의 정신이며, 진취적 기상으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하나의 민족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고유의 무예 태권도는 자기보존의 본능에서 발생한 오로지 힘과 기술적인 측면만이 모든 것이 아니라 호랑이처럼 용맹스러워 정의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며, 책임을 중히 여기는 선비 기질과 작은 미물과도 함께 호흡할 줄 아는 만인 평등사상을 품고 있으며 인격의 완성을 향하여 부단히 정진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태권도의 내면적 정신세계에 흐르고 있는 홍익인간, 평화정신, 정의를 수호하는 결백정신 및 투철한 책임감 등을 하얀 도복 안에 품고 한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서 태권도 정신을 확립 · 실천함으로써 이를 생활화하고 나아가 조국 발전의 정신적 지주로 승화시켜 조국번영의 선봉이 되는 긍지 높은 태권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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